전영재 기자의 DMZ로 떠나는 생태기행
우리 선조들은 자연친화적으로 살았다.
철이 들어야 한다는 말은 언어그대로 계절의 변화를 알아야 나이값을 하고 어른으로 대접을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입춘이 되기전 선조들은 벼농사 싹틔울 준비를 했고 봄바람이 불면 논과 밭으로 나가 본격적인 일년를 피땀흘리며 농사를 지었다.
한 여름이면 뙤약볕에서 홍수대비를 했고 찬바람이 불면 가을걷이와 겨우살이를 위한 땔나무를 준비했다. 미리미리 계절의 변화를 대비하지 않으면 자연에 동화돼 살아갈 수 없었다.
이 자연친화적인 삶은 기계 문명이 발달하면서 달라졌고 계절에 대비한 선조들의 삶을 일대 변혁을 맞았는지도 모른다.

용늪의 가치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3월.

한국자연보존연구회와 미국의 스미소니언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비무장지대 인접지역 종합 학술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한에 하나밖에 없는 고층습원으로 매우 독특한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용늪의 비밀이 5천년이 지난 뒤에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1999년 1월 용늪을 찾았다.
용늪의 여러 식물들이 마른 갈색잎으로 옷을 갈아 입고 대지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에서 과연 이곳에 생명이 잉태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고산에 있는 척박한 죽음의 땅으로 다가왔다.
길고도 매서운 용늪의 겨울은 여기 저기 생명의 기운이 움트고 차 오르는 3월이 돼도 여전히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정말 이 곳이 지형과 식물학자들이 칭송하는 자연사의 박물관이라고 한 이유를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오로지 황량하고 척박한 불모지였다.

3월의 용늪엔 생명이라곤 전혀 느낄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죽은 마른 풀들이 마치 볏단을 세워 놓은 듯 불룩불룩 튀어나온 모습만이 용늪을 휘감고 있었다.
3월 중순 용늪을 올랐을 땐 하얀 눈꽃마저 피어나 겨울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었다. 길고도 매서운 용늪의 겨울은 계속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