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재 기자의 DMZ로 떠나는 생태기행
산양이 비무장지대에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한 것은 우연이었다.
     
  다른 야생동물인 수달이라는 놈을 한 번 자연상태에서 제대로 촬영하려고 출장 계획을 세워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있는 육군을지부대 전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 당시 안내장교인 이종수 중위가 한마디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전기자님! 여기 수달이 있다는 얘기는 병사들에게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뭐 산양이라든가, 흑염소같이 생긴 것이 00연대 지역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살고 있다나요.
비포장 전방 길을 운전하며 가던 나는 차를 세우고 안내장교를 쳐다보며 다시 확인했다.

산양이요! 천연기념물 산양 말입니까? 그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밀렵꾼에 잡혀 죽었던 그 불쌍한 양구 경찰서의 산양이었다.
 
제대로 산양을 촬영해서 이 땅의 산양 생태계를 생생하게 기록하자는 다짐을 하며 안내장교에게 그 곳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그 때 분단의 아픔은 현실로 다가왔다.
한마디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취재진들이 가기 위해서는 육군 본부에 출입신청 을 해, 어디를 어떤 목적으로 가는지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육군본부에 출입 승인 절차를 밟고 다시 육군 을지부대 관할 최전방으로 가는데는 일주일이 또 필요했다.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서화 검문소에 도착했다.
     
 

어떤 군 시설을 보더라도 사회에 나가 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안내 장교 말로는 여기서 한 두시간 정도를 가야 사철리라는 지역이 나온다고 했다.
살아 있는 산양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 책에서 봐왔던 동물원에서 크게 전신만이 찍힌 산양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자연 속에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산양'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맥박이 빨라지며 심장의 고동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느 전방이나 다 그러하듯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하면 군사보급로를 제외하고는 미확인 지뢰지대의 푯말이 길 양쪽으로 쭉 이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1시간 20분 가량을 가니 좌측엔 향로봉이 보이는 정상이 나타났다.
설악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모두 보이는 그 정상에 병사들은 일부 포장도로를 해놓고 '을지로'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안내장교는 전기자님! 저 밑에 대관령처럼 꾸불꾸불한 길 보이시죠, 저기로 내려가야 산양이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웬만한 비포장도로나 험한 산악도로를 많이 다녀 봤지만 산양이 살고 있는 '사철리 부근'은 강원도 비포장 길에서 최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개가 많고 험하다는 대관령의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은 그래도 '사철리 산양 만나러 가는 길' 보다는 나았다.
곡예운전을 하고 파김치가 돼 현장에 도착한 필자와 문영태 카메라맨은 안내장교의 전방 상황을 듣고 산양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산양 서식지역이라는 기암절벽에서 모든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산 정상까지 방송장비를 메고 올라가 산아래 산양 서식지역을 바둑판처럼
     
.  

나눠 쪼개며 확인작업에 들어갔지만 전혀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산양은 나타나질 않았다.

그 거친 비포장도로를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기다림이 일주일째 되던 날! 산양 한 마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맨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취재팀과의 거리는 약 5백미터! 텔레비전 카메라 파인더로 확인해 보니 검은빛의 산양은 하나의 검은 점으로 들어왔다.
망원경으로 산양을 보았을 때도 크기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특징인 뿔이 선명하게 보였다.

     
오랜 추적과 기다림 끝에 건강하게 이 땅에 뛰놀고 있는 산양이 비무장 지대에서 확인된 것이다.
비무장지대의 산양 서식 확인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역사의 오류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 동안 비무장 지대 산양 서식지는 학자들에게 고진동계곡만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취재팀이 새로 확인한 사철리 계곡은 그 동안 밖의 세상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이때부터 문영태 카메라맨과 필자는 숨막히는 잠복 취재를 계속하며 산양의 생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이루는 특이한 모습을 관찰했다.
좀처럼 무리를 이루지 않는 산양이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문영태 카메라맨은 한달이상 기다리며 한국방송사상 처음으로 이 무리를 이루는 독특한 생태를 텔레비전 카메라에 담느라 파인더와 녹화 버튼에서 눈과 손을 떼지 못했다.
모두 확인된 산양은 22마리.
텔레비전 카메라 팬샷 (카메라를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 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찍는 것을 말함)으로 들어온 산양은 12마리나 되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남북의 산양이 만나 반세기가 넘도록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그랬다.
1964년 설악산에서 거의 몰살지경에 이르렀던 산양이 그래서 한 두마리만 관찰되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특종이 되던 산양이 비무장지대에는 큰 무리로 집단을 이루며 살아온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해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적색자료서에 올라 있는 산양무리가 우리곁에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산양의 새로운 집단 서식지를, 그것도 비무장지대에서 확인했을 땐 아무리 절망적인 땅에서도 새로운 역사의 희망이 솟아 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거대한 분단의 철책선은 비무장지대에 살고 있는 산양에겐 어느 밀렵꾼도 다가 갈 수 없는 가장 안전한 보호망이 된 것이다.